자화상
고흐는 거울 앞에 섰다.
그의 말처럼 '모델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어서였을까.
거울은 그에게 특별한 창문이 되었다.
자화상을 그리는 동안
고흐는 화가이자 모델이었고,
관찰자이자 피 관찰자였다.
자기 얼굴을 그리는 일은,
자신과의 긴 대화였는지도 모른다.
고흐는 스스로와 마주하며
30점 이상의 자화상을 남겼다.
그중 세 편의 자화상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밀짚모자의 노란 빛
파리의 빛은
고흐의 팔레트를 바꾸어놓았다.
네덜란드의 어둡고 무거운 색채는
잠시 팔레트 한편에 밀려났다.
노란 밀짚모자 아래로 쏟아지는 빛이
얼굴을 따스하게 비추고
붉은 수염을 생기있게 물들인다.
부드러운 붓 터치 사이로
파리의 맑은 공기가 스며든다.
이 자화상에는 드물게 평온함이 깃들어 있다.
마치 새로운 빛을 발견한
고흐의 설렘이 고스란히 담긴 듯하다.
영혼의 눈빛
고흐의 자화상은
한 인간의 깊은 내면을 담아낸다.
고흐는 사회적 지위나 외모와 관계없이
모든 인간의 영혼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표면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면의 진실을 그리려고 했다.
이 자화상 속 눈빛은
자신의 영혼뿐 아니라
보는 이의 내면까지 직시하게 만든다.
배경을 가득 채운 초록빛과 오렌지빛 점들이
눈동자를 자연스럽게 강조한다.
쇠라의 점묘법은 고흐의 손끝에서
감정의 언어로 바뀐다.
초록빛 눈동자는 똑바로 우리를 응시한다.
나는 성당보다
사람의 눈을 그리는 것이 좋다.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True Color
창백한 얼굴, 움푹 파인 뺨,
그러나 더욱 강렬해진 눈빛.
고흐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팔레트를 든 손은 단호하다.
거친 물결처럼 휘몰아치는 푸른 배경 속에서
노란빛 머리카락은 불꽃처럼 일렁인다.
고흐는 자화상을 그리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이 자화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냈다.
나는 화가다.
이 자화상에는
무언가 다급하고 절박한 것이 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붙잡아두고 싶은,
아니면 자유롭게 놓아주고 싶은.
그것은 자신과의 마지막 대화였는지도 모른다.
세 편의 자화상은
각기 다른 고흐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 모든 얼굴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한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용기,
그리고 그것을 그림속에 담아내는 정직함이다.
거울 앞에서 고흐는
단 한 번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백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고흐는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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