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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이야기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전시 후기 | 서울 무료전시 추천

by innarte 2026. 9. 10.

전시 정보

전시명: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작가: 유영국
기간: 2026.05.19 ~ 2026.10.25
장소: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관람료: 무료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 유영국, 1977

 

유영국은 평생 산을 그렸다.

하지만 그의 산에는
나무도 길도 사람도 거의 없다.

대신 색이 있고 선과 면이 있다.

붉은 산과 보라색 산,
초록의 능선과 노란 하늘.

눈앞의 산을 그대로 그리기보다
자연에서 얻은 인상을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바꾸었다.
1960년대부터 산은 주요한 모티프가 되었다.

전시장에는 그렇게 만들어진
수많은 산이 펼쳐져 있었다.

 

유영국, 《정상》, 1966

유영국, 《정상》, 1966,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직접 촬영

 

아래쪽에는 짙은 초록이 넓게 깔려 있다.

봉우리 몇 개가 어두운 색 속에 잠겨 있고
위로 올라갈수록 화면은 밝아진다.

초록을 지나 노랑에 이르면
아래쪽에 머물던 눈도 자연스럽게 위를 향한다.

그리고 가장 밝은 곳에
붉은 봉우리 하나가 솟아 있다.

화면에서 차지하는 크기는 작지만
시선은 그곳에 머문다.

제목은 《정상》.

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새 눈으로 산을 오르고 있었다.

 

유영국, 《원-A》, 1968

유영국, 《원-A》, 1968,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소장 ❘ 직접 촬영

 

화면 전체를 붉은빛이 채우고
두 개의 원이 위아래로 떠 있다.

유영국에게 색은 중요한 조형 언어였다.
강렬한 색도 어떻게 배열하고 대비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리듬과 균형을 만든다고 보았다.

원을 바라보니
떠오르는 태양 같기도 하고
저무는 해 같기도 했다.

한참 보고 있으면
풍경을 바라본다기보다
마음속에서 무언가 천천히 차오르는 느낌이 든다.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기는 어렵다.

붉은색 안에서
감정 하나가 조용히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유영국, 《작품》, 1968

유영국, 《작품》, 1968, 개인 소장 ❘ 직접 촬영

 

산은 여기서 더 단순해진다.

화면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삼각형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선,
노랑과 주황, 붉은색의 넓은 면.

몇 개의 선과 색만 남았는데
산의 기운은 오히려 선명하다.

산에서 하나씩 덜어내다 보면
마지막에는 무엇이 남을까.

봉우리와 능선, 그리고 빛.

어쩌면 유영국은 산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
산을 산답게 만드는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영국, 《작품》, 1981

유영국, 《작품》, 1981, 개인 소장 ❘ 직접 촬영

 

처음에는 산으로 보였다.

조금 지나자 바다가 보였고 파도가 보였다.

길게 뻗은 형태는 새의 날개 같기도 하고
커다란 나뭇잎 같기도 했다.

하나의 이름을 붙이는 순간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무엇을 그렸는지 알아내려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이 가는 대로 형태 사이를 따라갔다.

추상화를 보는 재미가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영국, 《사계절》, 1981

유영국, 《사계절》, 1981, 개인 소장 ❘ 직접 촬영

 

개인적으로 오래 머물렀던 작품이다.

흰색과 보라, 초록과 붉은색.
강한 색들이 마름모꼴의 면을 이루며
산맥처럼 이어진다.

어느 하나 평범한 색은 아닌데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이 그림 앞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은 ‘조화’였다.

서로 같아져서 편안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채로 함께 있는 것.

그 차이가 화면에
하나의 리듬을 만든다.

 

유영국, 《작품》, 1987

유영국, 《작품》, 1987, 개인 소장 ❘ 직접 촬영

 

앞선 작품에서 솟아오르던 산은
이제 길고 낮은 선이 되었다.

푸른색과 초록색의 면이
화면을 가로질러 천천히 흐른다.

유영국은 예순 이후
자연으로 좀 더 부드럽게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후기 작품에서는

자연과 내면이 가까워지며
고요와 긴장이 함께 나타난다.

강렬했던 힘이 사라졌다기보다
안으로 가라앉은 것 같았다.

산은 더 이상 높이 솟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멀리, 오래 이어진다.

 

유영국, 《산》, 1988

유영국, 《산》, 1988, 한솔문화재단 소장 ❘ 직접 촬영

 

다시 산이다.

붉은 하늘 아래
보라색 산이 크게 솟아 있다.

초록과 주황, 보라와 붉은색.

자연에서는 좀처럼

한자리에서 만나기 힘든 색인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다.

실제 산의 색을 떠난 뒤에야
유영국만의 산이 나타난다.

산은 풍경이면서
색이고, 선이고, 면이 된다.


화가의 눈은 언제나
먼 곳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세부적인 것에서 
눈을 먼 곳으로 돌릴 때
산이 있고 바다가 있고
자신의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 유영국, 1983

 

전시장을 걷는 동안
수많은 산을 만났다.

어떤 산은 날카롭게 솟았고
어떤 산은 길게 누워 있었다.

붉었다가 푸르렀고,
때로는 보라색이었다.

같은 산은 하나도 없었다.

 

유영국에게 산은 눈앞의 풍경만은 아니었다.
고향 울진의 자연에서 시작했지만
오랜 시간 기억과 내면을 거치며
선과 색의 산이 되었다.

 

산은 그대로 있어도
산을 바라보는 사람은 변한다.

 

그래서 평생 산을 그린 화가의 그림에서
나는 수많은 산보다
한 사람이 지나온 시간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