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오래 머물고 싶은 전시를 만났다.
대릉원과 황리단길 사이,
오아르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다 유키마사의 개인전
《Remembering You: 기억의 행위》다.
회화와 조각, 영상까지 50점 안팎의 작품이
2층과 지하 1층에 걸쳐 이어진다.
작품을 보다 고개를 돌리면
통창 너머로 왕릉이 들어온다.
그림을 보고,
왕릉을 바라보고,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좋았다.
전시 정보부터 실제로 오래 머물렀던 작품,
오아르미술관에서
놓치기 아쉬운 공간까지 정리해 본다.
전시 정보
| 전시명 | 《Remembering You: 기억의 행위》 |
| 작가 | 이다 유키마사(Yukimasa Ida) |
| 기간 | 2026.08.23 ~ 2027.03.14 |
| 장소 | 경주 오아르미술관 2F, B1F |
| 운영시간 | 수~월 10:00~19:00 최종 입장 18:30 |
| 휴관 | 매주 화요일, 설·추석 당일 |
| 관람료 | 성인 8,000원 소인·경로 5,000원 |
| 주차 | 전용 주차장 이용 가능 미술관 이용 시 1시간 무료 |
왕릉 앞 작은 미술관

오아르미술관에서 가장 먼저 기억에 남은 것은
작품이 아니라 창밖 풍경이었다.
전시장 통창 너머로 왕릉이 보인다.
경주에서는 익숙한 풍경인데
미술관 안에서 그림과 함께 바라보니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이번 전시에는 실제로 경주를 방문한 뒤
제작한 작품도 있어
전시장 안과 밖의 풍경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규모가 큰 미술관은 아니다.
오히려 그래서 작품을 빠르게 따라가기보다
마음에 드는 그림 앞에 머물다가
창가에 앉아 쉬어 가는 방식이 잘 어울렸다.
한 번뿐인 순간을 그리다
일본 작가 이다 유키마사의 작품을 처음 본다면
먼저 물감의 두께를 눈여겨보면 좋다.
물감을 두껍게 쌓는 임파스토와
강한 붓질을 사용하기 때문에
사진으로 볼 때와
실제 작품 앞에서 받는 인상이 꽤 다르다.
작업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열쇠는
일본 다도 문화의 이치고 이치에(一期一会)다.
모든 만남은 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생각이다.
이다는 지나간 사람과 장소, 하루의 순간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자신의 기억과 감각을 거쳐 다시 화면에 불러낸다.
이번 전시 역시 초상에서 시작해
경주에서 출발한 신작,
미술사 속 작품에 대한 오마주,
하루를 기록한 작업과 영상으로 이어진다.
가장 오래 본 그림, 〈밥〉

이번 전시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은 〈밥〉이었다.
멀리서 보면
수염 난 남자의 얼굴이 먼저 들어온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면
눈가와 콧등에 덩어리째 쌓인 물감이 먼저 보인다.
짙은 수염과 잿빛 화면 사이에는
붉은 물감 한 덩이가 강하게 남아 있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건
보는 거리에 따라 그림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가까이에서는 물감과 붓질이 보이는데
몇 걸음 물러서면
흩어져 있던 흔적들이 다시 얼굴이 된다.
이다는 사진과 실제 기억을 바탕으로
인물을 그린다.
한순간을 고정한 사진과
시간이 지나며 달라진 기억이
한 화면 안에서 만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실제로 앞뒤로 움직이며 볼 때 훨씬 재미있었다.
〈밥〉과 함께 보고 싶은 〈미코〉

〈밥〉이 좋았다면 바로 이어서
〈미코〉도 눈여겨볼 만하다.
흰색을 중심으로 파랑과 분홍, 초록의 붓질이
얼굴 주변을 빠르게 지나간다.
〈밥〉의 묵직하고 가라앉은 화면과 비교하면
같은 작가의 초상인데도
움직임이 훨씬 크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 앞에서
문득 그리운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생김새는 어느새 흐릿해졌는데
내 말을 들을 때 가만히 바라보던
눈빛만은 아직 또렷하다.
전시의 여러 초상을 보고 있으면
이다가 사람의 외형만
그리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조금씩 보인다.
경주에서만 더 재미있는 작품

이번 전시에서 특히 눈여겨볼 작품은
〈스케치북에서 #8〉이다.
이다는 20년 넘게 스케치북에
매일의 생각과 감각을 기록해 왔다.
이 작품은 작가가 경주를 방문한 뒤
남은 경험과 기억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경주를 그렸다고 해서
왕릉이나 기와 같은 형태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화면을 채우는 것은 색이다.
밝은 노랑 위로 붉은색이 흩어지고
파랑과 보라가 화면을 가로지른다.
경주의 어느 장소를 그렸는지 찾아내는 것보다
작가에게 경주가 어떤 색과 감각으로
남았는지를 보는 편이 재미있다.
그리고 이 작품을 보고 나서는
꼭 통창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기를 권하고 싶다.
조금 전 색으로 만났던 경주와
창밖의 실제 풍경이 한자리에 놓인다.
익숙해서 더 낯설었던 〈게르니카〉

미술사 속 작품을 오마주한 공간에서는
〈게르니카〉가 가장 눈길을 끌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떠올리게 하는
황소와 말, 사람의 형상이 금세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재료가 달라졌다.
작품은 나무에 아크릴로 제작되었고
바탕에는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난다.
표면에도 높낮이가 있어
정면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굴곡이
옆으로 움직이면 훨씬 선명하게 나타난다.
평면으로 익숙했던 이미지가
물성을 가진 대상으로 바뀌면서
알고 있던 〈게르니카〉가 낯설게 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 역시
정면에서 한 번 보고 지나가기보다
조금 옆으로 이동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같은 작가가 맞을까, 〈오늘의 끝〉

또 하나 의외였던 작품은 〈오늘의 끝〉 연작이다.
앞에서 본 초상과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빨간 공중전화 부스와
유리에 남은 낙서,
바닥의 구겨진 종이까지 보인다.
두꺼운 물감과 거친 붓질을 보다가
이 그림 앞에 서면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는지
캡션을 다시 보게 된다.
이다는 하루를 마치며 한 점씩 그림을 완성하는
〈오늘의 끝〉 연작을 이어오고 있다.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그날 눈에 들어온
일상의 장면을 남긴다는 점도 흥미롭다.
초상과 표현 방식은 전혀 다르지만
한 번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는 순간을
기록한다는 점에서는 연결된다.
전시 마지막에는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영상도 이어진다.
오아르미술관에서 놓치지 말 것
작품을 다 봤다고 바로 나오기에는
오아르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조금 아깝다.
통창 앞에는 한 번 앉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왕릉을 바라보며 잠시 쉬었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도 좋다.
3층에는 작은 테라스가 있다.
날씨가 괜찮다면
밖으로 나가 주변 풍경도 바라보자.
1층에는 카페가 있다.
이곳 역시 통창 쪽으로 왕릉을 볼 수 있어
관람을 마친 뒤 쉬어 가기 좋다.
이다의 초상 작품은 특히
멀리서 한 번,
가까이에서 한 번 보는 것을 추천한다.
사진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는
물감의 두께와 표면이
실제 작품에서는 훨씬 강하게 다가온다.
전시 후 들르기 좋은 곳
전시를 본 뒤 차 한잔하고 싶다면
가까운 테라로사 경주점으로 이어 가도 좋다.
한옥 여러 채와 마당이 어우러져 있고
돌담 너머로 고분이 보인다.
오아르미술관에서 왕릉을 바라봤다면
이번에는 조금 다른 자리에서
경주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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